가벽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 김화용
죽음의 장면들
경기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극심한 돼지열병이 발병했다. 생매장이 결정되기 전까지 한 뼘 움직이기도 어려운 감금틀에서 살았을 11만 마리가 넘는 돼지는 틀에서 해방되는 순간 생매장을 당했다. 주변의 땅은 피로 물들더니 붉은 강이 흘렀다. 아마존, 호주에 이어 최근에는 캘리포니아까지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회자되던 곳곳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불길은 쉬 잡히지 않고 번져갔다. 수많은 생명종(種)이 목숨을 잃고 지역의 생태계가 불타고 있다. 남극에서는 기온이 영상 20도 훨씬 넘게 치솟아 빙하가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눈과 얼음이 녹아 진흙 범벅이 된 펭귄의 사진이 내셔널지오그래픽 SNS 계정에 올라왔다. 뉴질랜드에서 5800여 마리 소가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냉동육이 아니라 최상 등급의 생고기가 되기 위해 살아있는 채로 화물선에 오른 것이다. 온난화로 인해 태풍이 전례없이 자주 잇따랐고 상당한 위력을 가진 마이삭을 만난 화물선은 침몰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소의 사체가 떠올랐다. 이 모든 일은 지난 1 년 안에 일어났다.
자연의 감각을 기민하게 느끼고 기후의 변화를 예측해 움직이는 비인간 동물과 달리 우리 인간은 가시적인 무언가를 직접 보고 온몸으로 크게 겪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려 드는 직관이 떨어지는 존재라서 그럴까. 우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나와의 연결감을 잘 인지하지 못했고, 동떨어져 보이는 사건 사고 간의 관계 또한 그저 일시적이고 파편화된 것이라 간주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일어나는 이 재난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인간의 욕망을 기반으로 구성된 세계와 그 세계를 작동하는 인간 중심적 시스템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인해 희생되는 비인간 생명종이 등장하는 풍경이라는 점에서 분명 궤를 같이한다. 균형이 어그러져 있고 죽음의 기운이 강하게 내려앉은 대재앙의 장면들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은 채, 4차 산업 혁명 같은 몇몇 기술적 방법으로 이 사태를 갈음하려는 꼼수는 이제 통하지 않을 거라는 알람이었을 것이다. AI가 인간과의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할 때 세계의 언론은 ‘앞으로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들썩거렸지만, 현재 인간의 삶은 어떠한가.
욕망을 전시하기, 사유를 실천하기
사실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의 위기, 장거리 무역 같은 과잉 세계화에 대한 우려와 ‘지역화(localization)‘의 중요성, 인류세와 포스트 휴먼 담론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했지만 정작 일상을 정치화하지는 못했다. 인간사의 견고한 패러다임을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위기만 탁상공론으로 떠들었댔다. 그 무엇보다 섬세한 감각을 동원하며 이야기하는 예술도 그닥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런 태도의 최전선에 있었다. 사회의 부정의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예술은 재빠르게 반응하면서도, 예술의 문법이 가진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속성에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다. 표현하고, 재현하며, 발표하는 과정에 균열을 내기란 쉽기 않아 보였다. 수많은 전시를 만들고 또 허물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술실천의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믿고 대답을 유예하는 와중 코로나라는 숨쉬기조차 두려운 강력한 감염병의 경고가 우리를 덮치고 말았다.
‘#ㅇㅇ계_내_성폭력’ 고발운동 이후 우리는 미술계를 비롯해 문화예술계가 눈 감고 허용했던 폭력을 뼈아프게 목격했다. 공기처럼 스며있던 폭력의 감각을 처절히 일깨우고 우리의 언어가 더욱 섬세히 점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훈련된 감각으로 비인간 생물을 다루는 예술을 다시 바라본다. 동물의 사체 심지어 살아있는 동물을 도구 삼는 사례는 미술사 내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고, 심지어 전위적인 시도라 주목받으며 예술적 권위마저 부여된 경우도 많았다. ‘표현의 자유’라는 말 뒤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소수자의 존재를 타자화하며 재현했던 관습과 어쩐지 닮아있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세계관’만큼이나 예술가가 자신과 변화하는 세계와의 관계망을 계속 점검하는 일은 중요할 텐데 말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미술관, 박물관 그리고 동물원으로 환원되는 ‘전시’의 역사는 제국주의가 욕망을 과시하던 것에서 그 맥이 이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한발 더 나아가, 문명/비문명을 구분하는 태도로 타문화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장을 만든 것이다. 더 많은 생명종이 사라져버린 미래에 현재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떨까. 비인간 동물의 생명을 이렇게나 잔인하게 다루고 이용한 야만의 시대로 기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백인이, 남성이, 나치가 감히 그럴 자격이 없었다고 역사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을 무엇으로 만들까
작가가 되기 위한 수련을 하던 때부터 작품을 위한 좋은 재료는 무엇이라고 배웠는지 떠올려 본다. ‘작품은 유구하게 보존되어 소장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가정 아래, 창작재료에 대한 관심은 재현과 보존 능력을 척도로 판단되었다. 오직 작품의 물리적 완성도를 위한 품질이 중요했지, 어떤 재료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는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고전적 미술재료들을 살펴보면 고급붓은 동물의 천연모로 만들어진 것이고, 캔버스 제작에는 동물의 젤라틴이 필요하며, 에보니 블랙과 같은 짙고 어두운색에는 동물의 뼈를 태운 물질이 여전히 사용된다. 안료의 주성분인 광물들은 언제까지 캐내어도 충분한 물질인지도 궁금하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과도한 윤리 엄숙주의 발언이라고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여타의 공산품의 경우 생산 과정에서 동물실험을 하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분위기는 오래되었고, 동물성 성분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지, 동물 억압적 과정을 포함하지 않는지 또 환경에 해를 덜 끼치기 위한 노력까지 표기하는 최근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미술재료에 대한 이런 의문이 마냥 과도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전통적 미술재료만 언급했지만, 뉴미디어 아트가 고민해야 하는 디지털 쓰레기나 다크 데이터 문제들도 가벼운 사안은 아니다.
2019년 11월 콜드플레이는 새 앨범 〈Everyday Life〉를 발표하며 가진 인터뷰에서 더 이상 기존 방식의 라이브 투어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공연할 때마다 발생하는 환경적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지속가능한 방식을 고민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고 싶다고 선언한 것이다. 투어가 시작되면 아티스트는 공연을 위한 장비를 싣고 많은 스텝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빈다. 행사가 열리는 곳마다 무대를 설치했다가 며칠 만에 철수하고 여러 종류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투어 기념 각종 기념품(굿즈)도 경쟁적으로 제작되고 수많은 관객이 모인 곳에서 나오는 각종 쓰레기의 양 또한 엄청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강제로 언택트 방식을 학습하게 되긴 했지만, 팬데믹 이전 콜드플레이의 이런 결정은 꽤 전복적이며 상징적이었다. 밴드라면 으레 당연한 예술 수행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대형 공연을 포기한다는 선언은 한 시대가 끝나는 장면 같았다. 특히 투어는 밴드의 수익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기에 그들의 선언은 더 강력하게 느껴졌다. 관람객 입장을 제한하고 있는 공연장이나 미술관은 감염병의 위세가 한풀 꺾이면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감염에 얼마나 취약한지도 알게 되었기에 이 강력한 재난 이후의 감각은 이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예술이 기후위기 시대의 난제를 어떤 방법으로 통과해야 하는지, 동시대의 위기를 발언하고 기록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예술의 패러다임 자체를 어떻게 바꿔낼 수 있을지, 우리에게 큰 과제가 남았다.
예술은 사회의 오류를 포착하고 상상력으로 경계와 한계를 탈주하며 세상에 질문을 던져왔다. 그렇게 구축된 예술적 성취는 미술관의 가벽위에 포개지며 많은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 미학적 성과가 흰 벽에 환영(幻影) 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벽 너머의 세계에서 사유의 일부가 되기 위해 예술은 이제 무엇과 헤어져야 할까. 그리고 그 후 무엇을 무엇으로 만들까.
글. 김화용
- * 이 글은 2020년 11월 월간미술에 기고한 ‘무엇을 무엇으로 만들까’를 재편집해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