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기술+말하기 / 전유진
# 10대
이 대상을 지칭하는 또 다른 범용어로 청소년(靑少年)이 있다. ‘푸르게 젊다’는 풀이가 이 시기에 적절하다 싶다가도, 이내 그 시기의 어두운 그림자까지는 포괄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단어는 어쩌면 그 시기를 지나온 성인의 바람을 담은, 혹은 추억을 담은 이상에 가깝다. 아름답지만 좋은 부분만으로 정제된 표현이다. 초기 기획에서 ‘10대’냐 ‘청소년’이냐 두 어휘를 두고는, 결국 후자가 자아내는 현실과의 괴리감, 좋은 면만을 강조 혹은 강요하는 사회의 편향성이 느껴져 다소 건조하나 ‘10대’를 택했다. 말 그대로 좋은 말, ‘청소년’이 불편한 것은 결국 이 단어가 빠뜨리고 있는 것을 우리 사회가 그대로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회가 이 시기의 어두움을 용납하는가, 인정하는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떠올리게 만들고 그 답은 결코 푸르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함께 공연을 만들었던 한 10대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의 계절이긴 한데 기후 위기 시대의 봄이나 가을처럼 사이에 끼어서 그 경계를 알 수 없고, 계절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글에서 나는 10대란 어떤 변화의 경계에 있으면서 모호하다는 점, 그리고 제대로 된 존재로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느낌을 읽었다.
제로의 예술에서 10대라는 대상을 떠올린 것은, 전 연령대를 놓고 봤을 때 가장 멀게 느껴지는, 그래서 가장 소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대에게 느껴지는 이런 거리감은 프로그램을 함께하고자 하는 기획자, 창작자/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2병’이라는 표현이 좀 더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의 초기 목적은 유머였겠지만, ‘병’이 주는 뉘앙스, 그리고 쓰이는 방식을 떠올려보면 마냥 편하게 웃기는 어렵다. 이 사회가 10대를 ‘소통이 어려운 (혹은 불가능한) 존재’로 타자화하고 있는 방증으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표현에 담긴 뉘앙스를 살펴보면, ‘중2병이라, 말이 안 통해’ 같은 소통을 포기하는 태도와 ‘중2병이니까 그냥 내버려 두자’ 같은 방관의 태도가 많은 경우를 차지하고 ‘중2병이잖아, 힘든 때야’ 같은 이해의 태도도 더러 있다. ‘중2병’에 자주 붙는 말들로 문장을 자동완성시켜보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왜 이토록 이 표현을 쉽게 쓸 수 있고, 왜 이토록 쉽게 이 표현에 웃을 수 있는 것일까. 10대는 누구나 꼭 한번은 겪는 시기이고, 그 시기의 질풍노도에 대해서도 대부분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이미 경험한 것이기에 별 문제의식 없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0대를 가장 먼저 떠올린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그들을 잘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결국, 잘 알면서도 잘 모르는 대상인 10대와의 소통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이 모순되고, 양가적인 감정을 먼저 의식하는 것이 아닐까. 잘 알지만 쉽게 말하지 않고, 잘 모르지만 같은 상황에 놓였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말이다.
# 기술
10대 기술 말하기에서 기술은 컴퓨터 기술, 인공지능 등 최신 기술에 가깝다. 기술이란 무릇 첨단 ICT를 말하는 거지!-가 아니라, 다른 입장의 이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주제로서 이 기술에 주목했다. 이미 전 세계가 기술에 대해 넘치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충분치 않다. 그 양은 많을지 몰라도 그 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이야기의 질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구체적인 주제가 존재하며, 그 속에 여러 의견(특히 이견)이 있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충분히 발화될 수 있는 장, 커뮤니티의 질로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술은 아직 논의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화젯거리나 소비의 대상에 가깝다. 시간이 갈수록 기술의 기능과 역할이 방대해지면서 기술의 격차, 윤리적 문제 등 논의가 시급한 사안도 쌓여간다. 사유와 담론의 부재는 기술을 이전보다 더 추상적이고 어렵게 만들고 결국 악순환의 연속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기술이라는 모호함 앞에서,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쉽게 갇히게 된다. 이분법적 접근은 현재 기술이 가진 복잡한 층위를 담아내지 못할뿐더러, 우리의 미래와 다양한 입장의 가능성을 납작하게 만들고 상상의 여지를 지워버린다. 기술은 잘 모르겠고, 흥미도 없고, 더욱 멀어지면서, 결국 두려운 대상이 되는 뻔한 과정에 놓인다.
# 말하기
마지막 ‘말하기’에서 <10대 기술 말하기>의 기획은 큰 장애물을 맞이하게 된다. 발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지난 해시태그, 미투 운동을 겪으며 재인식했음에도, 어지간해서는 10대들의 생각을 그들의 목소리로 듣기는 쉽지 않았다. 자기소개부터 힘들어하는 모습에 시작부터 이렇게 어려우면 어떡하지 하다가도 나의 10대를 돌이키며 ‘자기소개’가 얼마나 낯선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새 학년이 되어 자기소개를 하는 수업이 있었던가, 학교든 학원이든 자기소개를 요청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자기소개란 10대의 환경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지도 모른다. 1차원적으로 내놓은 답변 속 학년이나 반 같은 소속부터 이미 임시적인 것이니까. 끊임없이 변하고, 임시적인 위치에 놓인 이에게 소개란 어떻게 다가올까. (동시에 효율을 지향하는 경쟁 사회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렵고 당황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자기소개는 여전히 힘든 것인가.
<10대 기술 말하기>는 5개의 섹션으로, 총 21회차(오리엔테이션까지 포함)에 걸쳐 중고등 학생 연령의 10대 50여 명을 온라인으로 만났다. 우리가 이들과 기술이라고 하는 막막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파헤치면서, 다르게 보는 방식을 공유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말하기’라는 경험을 충분히, 그리고 잘 끌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이번 만남이 그들에게 자기 생각을 틔우는, 발화를 위한 발아 과정이 되었기를 바란다. 기술이 내 삶과 일상, 행동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남이 하는 말, 혹은 미디어에서 본 것이 아닌 당사자로서의 주체적 입장이 생겨난다. 배워야 하는 목표로 멀게만 느껴졌던 기술을 나와 상관관계에 놓인 실체이자 사회적인 요소로 가깝게 보게 되었다면 초기 기획의 반은 성공한 셈이다. 다만 다양한 견해가 자유롭게 교차하는 말하기의 장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며, 교육시스템과 가정, 10대가 속한 기본환경의 노력뿐만 아니라, 예술과 같은 외부의 현장에서도 10대를 둘러싸는, 다각도의 시도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글. 전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