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몸을 위한 발레 / 윤상은
지난 10월, 발레를 제대로 접해본 적 없는 여성들,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여성들이 광주의 한 연습실에 모였다. 내 몸을 더 이해하고 싶어서, 내 몸과 더 친해지고 싶어서, 바르고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싶어서,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어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기라서,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발레 슈즈를 신고 랩스커트를 맞춰 입은 참여자들은 발레의 기본 동작을 배우고, 왈츠 리듬에 맞춰 춤을 췄다. 거울에 비친 자세를 확인하면서 발끝을 뻗었다가 구부리고 손을 모아 팔을 들어 올렸다. 짧은 휴식 후에는, 윤상은 안무가가 바닥에 마스킹 테이프로 표시한 사각형이 하나의 무대가 됐다. 여럿이서 구도를 잡아 가상의 무대를 채워보기도 하고, 각자 주인공이 되어 등장부터 퇴장까지 자신만의 움직임을 마음껏 펼쳐보기도 했다. 처음 시도해보는 발레 동작으로도 자신의 끼를 마구 방출해 지켜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모든 몸을 위한 발레’는 60~7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발레 워크숍이다. 발레에 적합한 몸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만의 발레’를 시도한다. 광주에서는 10월 22일, 10월 29일, 11월 5일에 진행되었고, 서울에서는 11월 19일, 11월 26일, 12월 3일에 진행된다. 발레를 전공하고, 박제된 여성 이미지에 운동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온 안무가 윤상은이 프로그램을 맡았다. 윤상은 안무가가 보내온 기획의 글을 아래에 함께 소개한다.
“엘리트 예술의 최전방에 있는 예술 장르인 발레는 여성들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로 자리 잡았을까.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와 비싼 티켓값, 고도로 훈련된 무용수들의 기이한 동작들, 혹은 일생에 한 번쯤, 무대 위 공주를 꿈꿔보는 선망의 예술. 어쩌면 발레뿐 아니라, 클래식 예술이 가진 지금의 위치와 위계는 ‘예술’이라는 단어 자체를 일반인은 가닿을 수 없는 높은 기술의 영역으로, 우리의 일상과는 먼 것으로 간극을 벌려놓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격차는 클래식 예술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옹호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발레는 정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영역으로 내려올 수 없는, 내려와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인가.
지난 작업에서 나는 순결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는 발레 속 여자 주인공들을 재현하는 것을 통해 발레가 추구하는 여성 이미지들을 다시 질문한 바 있다(‘죽는 장면’, 초연: 2020년 2월 20일 문화비축기지T4/재연: 2020년 7월 15일 1M SPACE). 또한, 작업 안에는 발레를 전공한 여성으로서 그러한 여자 주인공이 되기를 꿈꿔왔고, 발레를 가르치면서 생계를 이어온 당사자로서 갈등이 중첩되었다. 그 갈등 속에는 결국 발레가 클래식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공고히 쌓아온 여성 혐오의 서사와 조각 같은 신체를 위해 스스로 억압하는 모습들, 또 교육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계속해서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숭고하게만 보이는 발레의 높은 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공연 후 관객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를 정말 사랑하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안무가님은 앞으로 어떤 다른 발레를 하실 건가요?’ 같은 질문을 쏟아낸 것이다. 발레를 강하게 비판하고 그것에서 어쩌면 벗어나고자 했던 내 욕망과는 다르게 관객들은 발레를 계속하기를 촉구했고, 나에게는 ‘그렇다면, 다른 발레를 하시오’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클래식 발레에 더 이상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또 발레의 대중화를 말하면서도 발레리나를 선망하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철 지난 공주 서사를 반복하고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이미지를 홍보하는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다면, 이제는 새로운 발레의 정수를 찾아야 할 때다. 이번 시도를 통하여, 그리고 따라오는 다른 기회를 통하여 ‘그렇다면, 다른 발레’를 차례차례 실험하고 싶다.
이번 ‘모든 몸을 위한 발레’는 60~70대 여성들과 함께한다. 이른바 ‘아줌마’라고 불리는 중년, 노년 여성들의 고정된 이미지를 타파하고, 젊고 날씬한 여성들의 영역에 갇혀있는 발레를 다른 장소로 꺼낼 때, 그리고 발레를 환상 동화가 아닌 현실의 몸을 직시하는 하나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때, 우리는 그 만남에서 어떤 ‘다른 발레’를 발견할 수 있을까. 대상이 주체가 되는 곳에서 발레가 어떤 유연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기대를 가지고 지켜본다.”
안무가 윤상은과의 인터뷰 (2020.10.29)
제로의 예술 최윤정 (이하 윤정): 오늘이 광주에서의 두 번째 워크숍이었어요. 진행하면서 어떠셨나요?
상은: 오늘은 조금 더 자유롭게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즉흥적으로도 움직여봤어요. 의외로 다들 끼를 대방출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즉흥적인 움직임이라고 해서 막춤을 추는 게 아니라, 제가 설명해드린 부분을 어떻게든 자신의 몸으로 해보려고 하셨죠. 순간의 판단력과 순발력을 발휘해서 동작을 엮으신 것 같아 재미있었어요. 발레는 팔 하나를 들더라도 해야 하는 것이 많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춤이어서 한 번에 잘 안 되지만, 그럼에도 내가 한번 해보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 매력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윤정: 즉흥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가상의 무대를 설정하셨죠. 이전에도 이런 장치를 사용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상은: 원래 즉흥 움직임 워크숍을 진행했었어요. 어떤 프레임이 스테이지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태도가 바뀌고, 저는 그 변화를 좋아해요. 그런 긴장감에서 공연적인 모멘트가 나온다고 생각해서 직사각형 무대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에요. 움직임 워크숍에서는 내가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움직임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프레임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서, 감상하는 사람의 눈이 될 수도 있고 만드는 사람의 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연습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옆에서 지켜보던) 태인: 발레 동작과 관련된 용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상은: 전문적인 용어를 익히고 사용하는 게 발레의 정통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이번에는 우리 식대로 바꿔서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대상자에 맞춰서 쉽게 설명할 때, 더 팍 꽂히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생각보다 참여자분들의 흡수력이 좋아서 같이 주고받으면서 노는 느낌도 많이 들었어요. ‘이런 게 있으니까 한 번 해보세요, 이렇게 하면 키가 커지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웃음)
윤정: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워크숍이 참여자들에게 어떤 경험이 되면 좋을까요?
상은: 제 편견일 수도 있는데, 60~70대 여성들이 뽐내고 다니는 일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무대에 서거나 마음껏 춤을 추는 경험은 거의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선은 이 순간을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발레에는 비판적으로 볼 지점도 있지만, 가슴을 쫙 펴고 언제나 당당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좋은 점이 있죠. 발레리나라고 하면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하고요. 그런 자세를 배워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수그리지 않고 팔자걸음으로 당당하게 걷는, 발레의 태도와 자세를 이 순간에 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윤정: 발레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작업(‘죽는 장면’)을 하셨어요. 이 워크숍이 앞으로의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상은: 사실 ‘죽는 장면’을 하고 나서는 발레에 학을 뗐어요(웃음). 다섯 작품에서 여자 주인공들이 죽는 씬을 나열한, 제 몸으로 반복해서 죽는 작업이었죠. 그러다 보니까 발레를 너무 열심히 훈련했어요. 죽을 때도 얼마나 사족이 긴지, 그냥 죽지를 않고 온갖 테크닉을 다 하면서 죽는 거예요. 체력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 작업을 보고 발레를 하고 싶어졌다는 반응이 있었어요. 앞으로 어떤 다른 발레를 하고 싶은지, 그럼에도 발레의 좋은 점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기도 했고요. 발레가 싫어서 이 작업을 하면서도 무대에서는 또 열심히 즐기면서 발레를 하는, 양가적인 면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온 것 같아요. 이번 워크숍을 하면서는 발레의 내 방식대로의 적용을 더 만들어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년 남성 등 대상군을 바꿔가며 더 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시리즈로 해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오늘은 이 참여자분들과 공연을 만들 수 있으면 너무 환상적일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오늘처럼) 한 사람씩 나와서 자기 흥에 취해 움직이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공연이 될 것 같았어요. 향후엔 안무가나 기획자로서 이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스쳐 갔고요.
윤상은은 발레를 전공하였고 현재는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박제된 여성 이미지에 운동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며 주요 안무작으로는 <죽은 대상을 위한 디베르티스망>, <늘어난 사랑(Stretched love)> 등이 있다. 최근에는 발레 작품 속 여성의 죽음에 질문을 던지는 <죽는 장면>을 안무하였다. 한편 몸의 움직임을 통해 누구나 일상을 다르게 보고 삶 속에서 예술창작의 기반을 마련할 수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움직임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블로그 <떵샤의 모던댄스> 운영자다. https://blog.naver.com/yse216
(정리: 제로의 예술 최윤정, 사진: 홍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