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Makes Zero
vol.1

어라우드랩(aloud_lab)에게 듣는 디자인 아이덴티티

‘제로의 예술’의 디자인을 맡은 그린디자인스튜디오 ‘어라우드랩(aloud_lab)’을 만나 디자인 아이덴티티와 작업의 뒷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라우드랩이 ‘제로의 예술’ 프로젝트에 어떤 태도로 접근하고 있는지, 디자인이 가지는 환경적 영향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왔는지 들어볼까요?

어라우드랩은 디자인을 통해 사회에 필요한 가치가 들리도록 실험하는 그린디자인스튜디오입니다. 김보은ㆍ김소은 디자이너 듀오 팀으로, 2020년 지구를 존중하는 디자이너와 제작자를 위한 종이/인쇄 가이드 ‘종이 한 장 차이’를 작업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라우드랩이 참여한 프로젝트들을 보면 다양한 단체와 적극적으로 협업해오신 것 같아요. ‘제로의 예술’ 프로젝트에 파트너로 함께하는 일은 어라우드랩에게 어떤 경험인가요?

라운드트라이앵글 때부터, 같이 일하는 분들을 클라이언트보다는 파트너로 보고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프로젝트가 비교적 많았어요. 이번에 함께하게 된 ‘제로의 예술’에서는 디자인 아이덴티티 자체가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은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작업해 오픈하고 나면 끝나는 경우가 많죠. 사용자에게 통일성 있게 보여주면서 인식시키는 과정도 필요하고요. ‘제로의 예술’은 이미 만들어진 아이덴티티를 응용하는 차원의 확장이 아니라,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가치 등을 담아 아이덴티티 자체를 조금씩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부분은 저희에게 새로운 방식이기도 해요. 더 고민하고 실험해볼 수 있는 지점이 있어서 흥미로워요. 숙제는 많지만(웃음) 재미있어요. 지금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닫지 않고, ‘제로의 예술’이 진행되는 동안 같이 호흡하면서 시도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로의 예술’의 디자인 방향을 어떻게 파동의 형태로 결정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로의 예술’에 참여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제로란 무엇이지?’였어요. ‘제로’라고 하면 보통 숫자 0을 생각하게 되니까 아무것도 없는, 비어 있는 상태를 떠올리기 쉽잖아요. 그런데 기획자분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제로’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움직이고, 확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에너지와 움직임을 나타내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러면서 생각했던 게 하나의 선이나 실 같은 것이었어요. 만약 하나의 실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이 실의 길이만큼 떨어져 있다면 실은 완전히 당겨져서 팽팽하겠죠. 연결되어 있지만,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긴장 상태에 있을 거예요. 그 상태에서 두 사람이 한 발씩 다가가면 느슨해지는 실은 어떤 가능성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떨어져 있는 긴장 상태가 나와 다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면, 가까워지고 느슨해진 두 존재 사이에서는 어떤 파동, 움직임과 에너지가 발생할 수 있어요. 그런 생각에서 아이덴티티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로의 예술’ 로고의 발전 과정에 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저희는 디자인에 이야기를 담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이덴티티 작업을 할 때는 단순화하고 직관적인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죠.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처음에 막연하게 떠올린 것은 하나의 이미지로 딱 고정된 건 아니었어요. ‘제로의 예술’에서 프로그램과 활동이 쌓여가는 것처럼 다양한 파형이 유연하게 쌓여서 제로의 시각적인 형상인 0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겹쳐진 파형에서는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는지 알 수가 없겠더라고요.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거리가 가까워지는 모양을 만들려고 했죠.

완성된 로고는 한쪽에서 파형이 시작되고 그 끝에 원이 있어요. 서로 떨어져 있는 상대가 파동으로 인해 가까워지는 모양을 표현해봤어요. 실 끝에 서 있는 나, 그리고 나와 거리가 있는 누군가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순간, 파동이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제로의 예술’의 ‘ㅈ’과 ‘ㅇ’의 형태, ‘ZERO’의 ‘Z’와 ‘O’의 형태일 수도 있죠. 원 자체가 ‘제로’를 의미할 수도 있고요.


디자인에 쓰인 색은 어떻게 선택하게 되셨나요?

사실 기획자분들과 처음 만난 날은 ‘블랙’의 담담한 이미지를 떠올렸었어요. 하지만 제로를 무()가 아닌 파동으로 해석해가면서 무채색이 제로에 가까운 색일까 고민하게 되었죠. 그러다 ‘소수공공성’이라는 글을 읽고 모든 색을 섞어버린 ‘블랙’은 평평함으로 위장한, 그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는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무채색보다는 더 활동적인 느낌과 아직 과정에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색이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그래서 선택한 색이 차가운 핑크였어요. 우리는 그룹 짓는 걸 좋아하잖아요.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색에서도 그렇죠. 요즘은 퍼스널 컬러로 웜톤과 쿨톤을 나누기도 하고요. ‘제로의 예술’은 떨어져 있는 두 존재의 거리를 좁히는 형상에서 디자인을 시작했기 때문에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의 거리를 줄이는 방식으로 색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차가운 핑크나 따뜻한 파랑처럼 반대되는 의미가 붙는 컬러를 사용하고 싶기도 했고요.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다르게 보이네요. 어떤 중간 지점, 그룹에 속하지 않은 부분을 색과 연관해 생각하면 회색을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저희 로고에서는 무채색이 아닌 쨍한 핑크색이 사용돼 처음에는 그 이유가 궁금했었어요. 차가운 핑크나 따뜻한 파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색에 대한 접근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핑크가 논란이 많은 색이다 보니(웃음) 색을 선택하는 일에 고민이 있기는 했어요. 핑크색은 빛의 삼원색 RGB 중 R(레드)과 B(블루)를 섞어 만들어지는 마젠타를 사용해요. RGB나 CMYK는 특정한 색을 표현할 때 어떤 척도, 기준이 되죠. 그래서 마젠타는 무언가를 구분하는 함의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색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고민이 담겨 있는 색이라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 같아요.


‘제로의 예술’은 기존의 대규모 공공예술이나 대중 캠페인과는 결이 조금 다른 공공성을 지향하는 프로젝트죠. 그 방향성에 대해 어라우드랩이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 디자인이나 제작물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색에 관해서도 그냥 핑크를 볼 때보다 차가운 핑크라는 표현의 의미를 설명할 때 덧붙여지는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이 던져질 수 있는 지점을 디자인에 반영하고 싶어요.


특별히 ‘제로의 예술’ 안에서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

‘제로의 예술’에서는 ‘과정의 제로’, ‘차이의 제로’, ‘제로의 거리’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하잖아요. ‘과정의 제로’는 무언가를 만들 때 삭제되는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하죠. 저희는 환경에 큰 가치를 두고 있는 팀이기도 해요. 가능한 저희가 하는 작업이 환경에 해를 덜 끼칠 방법을 고민해 디자인하고 제작하려고 하죠. 디자이너로서 그런 방법을 제안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제안이어야 한다는 한계가 있어요. 물론 ‘제로의 예술’에서도 현실적인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저희가 실험해볼 수 있는 폭이 더 클 것 같아요. 마지막에 나올 책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인쇄물이나 다른 제작물의 방식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 대답을 들으니 어라우드랩이 지금까지 선택해온 작업의 방식이 궁금해져요. 환경을 위한 디자인은 어떤 프로세스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저희는 친환경 디자인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디자인이 절대 환경과는 친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웃음). 간혹 단순히 어떤 소재를 쓰는 것만으로 환경을 위한 브랜드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있죠. 하지만 물건의 전체적인 생애, 원료부터 폐기에 이르기까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다 있다고 생각해요. 종이는 재료로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아이디어와 디자인 작업에서 작업물이 나중에 어떻게 버려질지를 고민해요. 무언가를 만들 때는 그게 정말 필요한지 한 번 더 고민해보고, 재료와 디자인, 제작과 폐기의 과정을 생각해보죠. 저희가 모든 과정에서 완벽할 수는 없어요. 다만,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분을 고려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지구를 존중하는 디자이너와 제작자를 위한 종이·인쇄 가이드와 샘플북을 담은 ‘종이 한 장 차이’ 프로젝트


디자인 스튜디오의 이름을 라운드트라이앵글(round triangle)에서 어라우드랩(aloud_lab)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최근 ‘목소리 내는 일’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하신 인터뷰를 읽었어요. 그런 생각의 변화가 새 이름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나요?

저희가 원래는 소극적인 사람이거든요(웃음). 그래서 따뜻한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이전 이름인 라운드트라이앵글은 환경, 사람, 지역 세 가지를 둥글게 아우르는 마음을 담은 디자인을 하자는 의미로 지었어요. 예전에 환경단체와 캠페인을 진행하던 때에는 강한 그래픽이 많았거든요. 저희는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러스트도 많이 활용했고요.

(좌측부터) 핫핑크돌핀스 아이덴티티 / 차는 천천히_로드킬 캠페인 / 녹사평기억교환소

그러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커지고 인식도 달라지는데 저희는 아직도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와 활동했던 분들이 직접 나가서 싸우기도 하고 기업에 항의 메일을 보내기도 하면서 변화가 생기는 걸 보게 됐죠. 저희도 그래픽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는 있었지만, 앞으로는 저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이전에는 환경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이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을 담을 수 있게 더 쉽고 부드러운 디자인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저희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지금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더 잘 들리게 할지 실험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가지고 활동하실 계획이신지 말씀해주세요.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 중 하나는 온라인 소재사전의 제작입니다. 예를 들어, 의류 패키지에 아크릴 100이라고 적혀 있더라도 그 아크릴이 정확히 어떤 소재인지는 알기 어렵죠. 가지고 있는 물건의 소재를 검색하면 환경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는 사전을 계획하고 있어요. 특정한 소재를 쓰거나 쓰지 말라고 강요하기보다는 소비자 입장에서 직접 선택하도록 하고 싶어요. 환경문제는 굉장히 복합적이라서 저희가 답을 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환경을 위한다고 하는 브랜드들이 상반되는 통계를 근거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래서 저희는 여러 소재가 가지고 있는 이슈를 알려주고, 선택의 기준이 되도록 하고 싶어요. 종이라는 재료를 다루었던 ‘종이 한 장 차이’의 확장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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